무리가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에 항상 언어를하며 긴장해야한다.
언어를 안하면, 논증과 증명을 벗어나서 어떤 말의 근거를 찾는다는 것을 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논증과 증명을, 언어를 되새김질하라고, 에피쿠로스 스스로 죽을 때까지도 꼭 외우리고 권고한다.
나 혼자 살래가 노예의 본질적 속성, 동물성의 근본이다.
자유가 소유권안에 잠식당하는 것을 견제하고 긴장하는게 공부이고, 그걸 안하면 다 떠나간다. 우리것이 안되면 내것도 될 수 없다.
조건대로 사는것은 구속이고 조건을 벗어나는게 자유다. 우리의 로고스를 벗어난 동물적 본성의 조건은 우리가 아니라 혼자의 소유권이다.
맑아지는 사람은 세속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다.
모든 철학은 충만한 일상에서 시작한다.
변화는 시작할 때 한번이고, 그 이후엔 그 각도를 유지해 지속해야한다.
모든 매력적인 것은 교조적이다. 그러나 교회에 가는 것과 댓글다는 것과 에피쿠로스/마르크스 학도가 되는 것과는 삶에서의 차이가 있다. 운동하는 포만과 늘어지는 포만과의 차이정도이다. 대다수의 민중들이 교회에 가는 것보다 에피쿠로스 학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 또한 결국 신앙과도 같다.
에피쿠로스의 고향인 사모스 섬은 이솝우화가 문서로 쓰여졌을 만큼 풍요로운 땅이었다. 풍요로운 농작물 중 하나가 머스켓포도, 포도주의 가장 럭셔리한 원료. 이 머스켓포도가 프랑스로 들어간 것.
유물론과 경험론이 갈라지는 여러가지 기준이 있는데, 경험론은 그냥 현상은 경험적으로 인식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 유물론은 배열이 중요하며, 뭉쳐야 잘 살고 새상을 바꿀 수 있다라는 것.
경험론자들은 단순히 인식하는 과정만을 설명하며 관망하는 자세이고, 유물론자들은 어떤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다.
멘한드로스, 극작인. 헬레니즘시대에도 우리시대와 같이 고전적인 영웅서사를 사람들이 보지않고 옆집아저씨아줌마 이야기들의 소소한 이야기, 드라마같이 내가 속물이라는 것을 다독여주는 것을 보았다.
아테네 학파, 뤼케리온같이, 명성 듣고 갔는데 별거 없다고 실망했다.
대중과 지식인이 절단되었다.
모든 무게를 가진 것들은 평등하다고 설파했다.
현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시대가 보이고, 그래야 우리의 타깃 또한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도 반체제적인 철학을 폈음에도 항상 국가행사에 참여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집단주의적. 민주주의는 집단적인 것. 기본적으로 투쟁논리는 진영논리이다. 진영이 어중간하면 지킬게 없는이고, 투쟁을 할 수가 없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두 곳에서 당시 유행했다. 알렉산드로스와 안티오케이아(셀레오코스, 페르시아 지역의 수도). 헬레니즘 양대 거점의 수도에서 유행했다.
플라톤이 데모크리스토를 멸시했던 것 처럼, 에피쿠로스학파들이 로마의 공화정을 해친다고 엘리트주의자인 키케로가 말했다.
사실 로마의 많은 공화파도 에피쿠로스, 브루투스도 에피쿠로스 학도.
귀족풍(소유권)을 살리고 싶은 프랑스는 이 그림을 비애의 그림으로 설명한다.
내거에 목숨거는게 사실은 내것을 지키는게 아니다. 공동을 창안하는 것이 내거를 지키는 것이다.
아르케는 근원을 찾는 것. 공격술.
아렛데는 탁월함. 탁월함은 공격술.
아타락시아는 원래부터 방어술.
에우다이몬은 원래 고대 그리스때만 해도 공격술이었는데 방어술로 변모했다. 이 때 역사적 퇴보가 들어온 것. 인간은 상승할 때 동물성을 물리칠 수 있지 하강할 때, 통장에서 돈이 빠질 때, 동물성을 물리치는 것은 쉽지 않다.
하강하는 시대의 자신감의 몰락은 우리에게 망령과 환상을 주입시키며 다시한번 투자자금이 핏속까지 빨아먹는 것을 신자유주의라 한다.
노태우 때 해외자본이 들어오고 투자가 뜨며 경제규모가 늘어났다. 이 때 먹튀한 놈들 때문에 IMF 닥친 것. 그나마 한국에서는 수혜를 받은 이들이 비교적 많아 중산층들이 꽤 있는 편.
양극화로 인해 유물론의 평등논리가 먹히지 않아 무게가 많이 나가는데도 영향력의 비중이 맞지 않는 시대에, 끊임없이 사유하는 지적 쾌락이 에피쿠로스가 수행한 방어술의 핵심전략. 이것은 자칫 명상같은 정적쾌락으로 오해될 수 있다.
이 지적쾌락의 방어술을 두고 니체는 에피쿠로스를 중위적으로 판단한다. 즐거운 학문은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니체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방어술을 회피술로 읽는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지적쾌락의 방어술이 개인에게는 무용할지 모르나 집단에게는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궁극에서 볼 때는 니체 책이 더 기쁘고 힘을주며 매력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니체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방어가 제대로 된 수에 공격을 해야 공격도 제대로 먹혀 들어갈 수 있지, 방어가 허술한데 공격했다간 다 무너질 수 있다.
에피쿠로스도 방어가 부족했기에 기독교인들에게 완전히 파멸당한 것.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설파한 지적쾌락은 매우 피곤하고 고된 여정이기에 기독교처럼 쉽게 살라는 달콤한 설교만큼 대중들에게 먹혀들기 힘들다.
사려깊고(공부하며 기른 유연한 적응력), 아름답고(꾸며라) 정직하지 못하면 즐겁게 살 수 없고
즐겁게 살지 않고는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직할 수 없다.
인생의 한계를 배우기 위해 달리며 넘어지고 오르며 떨어져도 봐야한다. 인생의 한계를 체험해 본 후에는 경쟁을 포함하는 행동을 필요로하지 않으며 우연의 도발, 우발성의 유물론을 기다릴 줄 알고 우정을 배운다. 그렇지 못하면 노예성을 가지고 학문을 적대적으로 하며 자신안에 갇혀 사유하고 동적쾌락인 사적 소유권만을 추구하게 된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경쟁적 사유가 자신의 동력이 되지 않으며, 지적쾌락을 추구하며 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의 한계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우정을 모른다.
우정에 기반을 두지않고 남을 돕는 것이 바로 미래를 파괴하는 행위. 종교인들과 유엔기구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우정없이 타자를 돕는다는 것은 그들의 자립성을 파괴하는 것이다.